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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있어서 나는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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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yamilk 작성일17-09-06 10:16 조회1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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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1994년 성당에서 만났다.

그는 수녀가 되려던 나에게 삭발까지 하고 구애를 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은 결혼이었다. 

변변한 직장이 없던 그를 우리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는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 일인지 알려준 사람이었다.



봄, 우리는 결혼했고, 곧 영훈이를 낳았다. 

이어 둘째 규빈이도 생겼다. 

임신 3개월째, 가장 행복해야 할 때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다. 



첫 번째 발병이었다. 친정 식구들은 유산을 권했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할 

막내딸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고집을 부려 규빈이를 낳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남편이 완쾌 판정을 받은 것이다. 

왼쪽 대장을 상당 부분 잘라내고 

그 힘들다는 항암 치료를 견디며 남편은 완치되었다. 

남편에게 가족은 힘이었고, 버티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암은 또다시 남편을 찾아왔다. 

이미 복부 림프절까지 전이되었지만 차마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암은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었다. 

CT 촬영을 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힘내, 응? 힘내."

그러나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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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왜 목소리가 작아?"

"병실이라 그렇지."

"아빠?"

"응, 왜?"

"아파요?"

"아니."

"거짓말, 아프면서..."

남편이 다시 입원한 후 아이들도 뭔가를 느끼는지

부쩍 아빠에게 자주 전화를 한다. 



병원에 갈 때마다 자꾸 우는 규빈이와 나는 약속을 해야 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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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남편에게 나아질 것이라고만 말했다.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는 상태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시동생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복도를 산책했다. 

갑자기 남편이 밖으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밖엔 너무 춥다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날씨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

생각해보니 입원 후 남편은 한 번도 외출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지상에서 만나는 마지막 바람, 햇살...

남편은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남편은 더 늦기 전 아이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나는 캠코더를 장만했다. ​

결혼 9년 만에 장만한 캠코더로 그의 마지막 인사를 찍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정성껏 남편을 단장해줬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내 남편.



"고마워."

남편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뭐가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남편은 씩 웃으며 내 얼굴을 처음 본 사람처럼 만진다.

"화장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이렇게 봐도 예쁘고, 저렇게 봐도 예쁘고.

.

.

미안하다. 

너에게 행복을 못 줘서 미안하고, 너에게 짐만 가득 주고 가서 미안하다. 

나중에 아이들하고 너무 힘들면, 

.

.

재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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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오전, 남편에게 극심한 호흡 곤란이 왔다. 

"조금만 힘내.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응?

애들 데리고 올 거야. 눈 떠봐. 응?"

남편의 숨소리가 거칠다. ​

여전히 따뜻한 그의 손. 

나는 아직 이 손을 놓을 수가 없다. 

학교에 있던 아이들을 막내 삼촌이 데려왔다. 

아이들이 서럽게 운다.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아빠, 고맙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그는 들었을까?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후 2시 55분. 

남편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를 만나고 사랑하고 부부가 된 지 9년 8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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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떠난 후 우리의 생활은 여전하다.

아이들은 점점 슬픔을 벗고 명랑해졌다. 

​나는 아직 아침저녁으로 그가 보냈던 문자를 본다. 

생전 그와 나누었던 평범한 메시지가 

이렇게 소중한 선물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때론 그의 무덤에 찾아간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무덤 앞에 가면 그만 눈물이 쏟아진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도 이 곳 뿐이다.



난 아직 그가 사무치게 그립다. 앞으로도 내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또 이 추억이 있어서 나는 살아갈 것이다. 

그를 떠올리면 그는 언제나 함께 있다. 



바람이 불면 그가 내 머리를 쓸며 내 곁에 와 있는 듯하다.

눈을 감고 그에게 말한다. 

안녕, 여보.

안녕, 영훈 아빠.



- MBC 휴먼다큐 사랑 10년의 기적 '지금, 사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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